[캠퍼스엔/차민준 기자] 조선 시대의 한 아버지가 우연히 타임머신을 발견하고 2020년 아침으로 온다고 상상해보자. 아침 밥상에 흰 우유에 말린 콘프로스트를 보고 “이 희멀건 죽은 무슨 죽인고?”할 것이며, 투블럭 머리를 한 남자와 숏컷에 붉은색으로 염색한 여자를 보고 자신의 상투를 만지작거릴 것이며, 검정 버킷햇에 상·하의 올블랙의 미니멀리즘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면 ”에구머니, 저승사자 아닌가!“할 것이며, 벼를 수확하는 트랙터를 보면 ”예끼 이놈!“하며 저고리를 휘날리며 달려가 벼를 뭉개는 트랙터에 금방이라도 이단 옆차기를 날릴듯한 뒷모습은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케 할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대로 왔으니 그 행동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우린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마치 다른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듯 하다. 엄마와 아빠는 아들, 딸의 인스타그램 속 ‘감성샷’을 이해할 수 없고, 아들과 딸은 엄마와 아빠의 산 정상에서 찍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이해할 수 없다. 카카오톡에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유튜브 메신저로 넘어가는 흐름에 아무나 편승할 수 없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핀더(W. pinder)는 동시대인일지라도 출생 시기가 다르면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에 세상을 다르게 읽으며 살아간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이 현상을 ‘동시대의 비동시성‘이라고 불렀다.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베이비붐 세대 세대, 386세대, X세대, Y세대, Z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전쟁부터 민주화 그리고 스마트폰까지의 변화는 따라가기 벅차 동시대일지라도 세대 간의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골을 만들었고 이는 갈등으로 이어 지곤 한다. 그 깊은 골을 메우기 위한 제대로 된 삽질이 필요하다.
<진정한 세대갈등 해소를 위해서>
“합시다 스크럼”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의 이렇게 시작한다. 스크럼(scrum)이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프로젝트 관리 기법으로 매일 아침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서로의 작업 상황을 공유해 일 처리를 빠르게 하기 좋은 방법이다. 스크럼은 10분 이상을 넘기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 속 회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 조회처럼 생각해 직원들이 10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20분 이상씩 회사 성장을 위한 일장 연설을 해댄다. 또 수평적인 조직체계를 위해 제니퍼, 케빈 따위의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데, 수평적인 조직체계는커녕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라며 수평적 조직을 위한 눈먼 삽질만 해댄다.
사내에 멋진 카페를 만들면 청년들이 지방중소기업에 갈 것이라는 주장이나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한다거나, 중동에 보낸다거나 하는 말은 스크럼을 아침 회의로 생각한다던가 ‘데이빗께서…’하는 것과 어딘가 닮아있다.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벼를 수확하는 트랙터가 벼를 뭉개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단 옆차기를 하는 꼴이다.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을 ‘열정 없고 편한 일만 하려고 한다’, ‘종일 휴대폰만 붙들고 산다’라든가 ‘대학 졸업장만 있어도 취업하던 시절’, ‘꽉 막힌 사람들’이라는 식의 피상적인 일반화는 위험하다. 이는 자연스럽게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서로의 경계선에 붉은 벽돌을 하나씩 쌓는 일이다.
그럼에도 ‘도대체 요즘 것들 왜 이래?’, ‘저 꼰대 또 난리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할 때가 있다. 우린 동시대에 살면서 동시에 비동시시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린 바로 옆에 있는 친구, 남편, 부인, 부모님조차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혹시 ‘요즘 젊은것들은’하고 혀를 끌끌 차고 그저 넘어가지 않았나. ‘요즘 젊은것들 왜 이래?’라는 의문에 그쳐서 안된다. 요즘 젊은것들이 왜 이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젊은이들은 안다. 회사가 자신의 노년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 꼰대는 도대체 왜 저래’하고 무시해버리지 않았나. 저 꼰대가 왜 저러는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기성세대는 기억한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눈부신 성과들을. “청바지를 입어도 꼰대는 꼰대다”라는 말은 수많은 청바지 애호가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지만 꼰대는 여전히 꼰대로 남아있다. 꼰대는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조차 되돌아보지 못한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골을 메우는 첫술이다. 그래야만 다음 삽질이 의미 있을 것이다. 애꿎은 트랙터에 이단 옆차기하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