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엔/이주미 기자] 영화 <메기>는 '믿음과 의심'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중심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의 영화다. 영화는 너무나 자명해서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믿었던 것들이 어쩌면 사실관계를 떠나 믿고 싶었던 나만의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러 번 일깨워준다.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몇몇의 에피소드를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첫 번째로 소개할 에피소드는 '성원의 반지 사건'이다. '성원'은 일을 하던 도중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반지를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반지를 계속해서 찾던 중, 같이 일하는 동료의 발가락에 자신이 잃어버린 반지와 똑같이 생긴 반지가 끼워져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성원'은 그 순간부터 동료를 의심하고 반지를 되찾아오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쓰지만 결국 의심의 대상이 된 동료와 감정이 상한다. '성원' 은 직장동료의 발가락에 끼워져있던 반지가 자신의 손가락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발가락 반지가 손에 맞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임을 깨닫는다. 두 번째로 소개할 에피소드는 '데이트 폭력'이다. 어느 날 '윤영'에게 성원의 전 여자친구 '지연'이 찾아온다. '지연'은 '윤영'에게 과거 성원과의 연애시절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지연'은 여전히 그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고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지만 지금이라도 움직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윤영'은 '지연'을 만난 후로 남자친구 성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두려움은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이 상상은 '성원'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고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헤어지고 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문득 지연의 말이 과장이거나 거짓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윤영은 그동안 혼자서 쌓아온 고민을 정면돌파하기 위해 성원을 찾는다. 그러나 윤영은 성원으로부터 '데이트 폭력을 한 게 사실'이라는 대답을 듣게 되고, 성원이 두 발을 딛고 서있던 자리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기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2015 에드거상 최우수 단편작으로 선정된 작가 길리언 플린의 소설 <나는 언제나 옳다>에서도 화자인 '나'가 믿고 의심하는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믿음과 의심에 대해 '나'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꽤나 합리적인 판단을 해나가는 것처럼 서술되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객관적인 팩트는 밝혀지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소설의 제목처럼 정말 언제나 '내가 옳았는지' 아니면 '네가 옳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의 말미에서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나'에게 "누군가는 거짓말을 한 상황에서 어느 쪽을 믿을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라고 말하는 '마일즈'의 대답뿐일지도 모른다.
영화 <메기>에서도 '경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내가 개를 고양이라고 우겨도 믿을 사람은 믿고 떠들 사람은 떠든다"라고 말한다. 이런 '경진'에게 '윤영'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누가 확실한 믿음을 보여준 적이 없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렇게 묻던 윤영도 결국은 그럴듯한 정황들 앞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 "신념은 자주 바뀐다."던 '경진'의 말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윤영의 신념 또한 변한 것이다. 또한, 영화의 끝에서 '경진'은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 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윤영'이 우연히 발견한 포스트잇의 메모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계속해서 구덩이를 파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만 나온다. 물론 구덩이로부터 빠져나온다는 표현을 믿음을 통해 의심하는 것을 그만두는 일로 해석할 때는 그렇다. 그러나 구덩이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을 의심이 생겨버린 상황이나 관계를 단절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것이 맞다. 이마저도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수많은 오해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누군가를 오해하는 입장도 되어보고, 누군가의 오해를 받는 입장에도 놓인다. 오해라는 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받고 싶어서 받는 것도 아니라서 모두가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의심을 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살다 보면 나 자신에게 의문을 품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모르는 것은 타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객관화를 가장 어려워하고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를 때가 많으면서도 가장 잘 안다고 믿는다.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니면서도 의심하거나 믿는 이유는 대개 '그러고 싶기 때문' 인 것 같다. 결국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의심하고 싶은 것을 의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의심하거나 믿는 것도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믿거나 의심할지는 자유지만 자유에는 늘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성원의 반지 사건'을 보며 의심이 더 커지기 전에 직접 물어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원의 대처를 답답하게 느꼈다. 또한, '성원'을 의심하는 '윤영'에게 '경진'은 "나라면 성원 씨한테 직접 물어볼 것 같아요."라는 조언을 건넨다. 그러나 의심을 정면돌파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최악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관객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나'는 성원이 직장동료에게 직접 물어보는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조언자의 입장인 '경진'역시 윤영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뻔한듯한 방법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입장이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은 편집되고 만들어진 사실로 넘쳐난다. 이런 사실들은 의심을 정면돌파하고 싶은 우리를 자꾸만 망설이게 만든다. 대부분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의심이 표면으로 드러났을 때, 싸움으로 번지게 되면 직접적인 갈등이 생겨버리니 피곤하고 의심을 애써 감추다 보면 풀리지 못한 상태로 남다 보니 속이 시끄럽다. 그렇다고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결정을 하긴 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피곤함을 견딜지를 택하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의심 앞에서 '수밖에'가 아니라 '싶었기 때문에'를 기억한다면 너무나 쉽게 편집되는, 걷잡을 수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사실들 앞에서 주관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빠져나올지를 고민하는 일이다.